고향의 향기
 
                                                                        권종면

 

동네 골목길 어귀마다 자란 풀포기 하나하나의 청초함.
주옥같은 이슬을 담뿍 머금고 고개 숙여 아침 햇살을 맞이하던 풀잎들……
흙냄새 자욱한 신작로 저 멀리 아른 거리며 피어오르는 환상의 아지랑이 모습. 온갖 잡초로 속살을 감춘 비좁은 논두렁에 터전을 마련한 이름 모를 풀벌레들.
샛밥을 머리에 이고 들녘을 향하는 소박한 아낙네의 모습.
 
휴식의 한 잔 막걸리에 논밭을 일구며 한 해의 농사를 다짐하던 동네 어르신들. 다색 찬란한 단풍이 수를 놓을 때에 맞추어 노랗게 물든 벼들이 온통 들녘을 메우고 농군들의 피와 땀의 결실을 성실하게 대변하며 수확을 재촉하던 속삭임들이 가득 메워졌던 우리의 고향을 회상할 때마다 연유 없이 가슴이 벅차오른다.
어린 시절 어르신들의 야단을 맞아가며 해가 저물도록 앞마당을 독차지하며 소꿉장난에 열중했던 기억들이 지금도 엊그제의 일처럼 생생하고 휘몰아치는 홍수로 신작로 길이 자취를 감추는 어느 등굣길 아침 가물거리는 선을 따라 불어난 물이 배꼽까지 차오른 길을 허우적거리며 학교로 향했던 순수한 열정들이 돌이켜 보면 낭만이고 소중한 삶의 추억이자 생의 윈동력이라 여겨진다.
순두부에 배추김치를 감아 먹고 멸치가 나오는 이 맘 때면 마늘종을 섞어 넣어 찌개 할 때 냄비 뚜껑을 열면 살이 토실토실한 멸치가 다시 살아날 것 같은 싱싱함에 입맛을 다시며 멸치젓을 양념장에 버무려 반쪽으로 갈라놓은 검은 핑크빛을 띤 속살을 더운밥에 곁들이면 고소한 맛에 넋을 잃어버리고 젓갈 맛에 흠뻑 취한 채 납작납작한 풋고추를 곁들이면 금상첨화인 것을……
겨울이면 살얼음이 언 도가니에서 동치미 무를 꺼내 한 개씩 깨물면 겨울밤이 지나가고 매생이 된장국이 너무나도 부드러워 입 속에서 녹아버리고 국 맛은 천연적으로 고소하며 깨소금 반찬 때문에 식사 시간이 무척이나 기다려지고 참기름이 둥둥 뜬 겨울의 김국은 일품이며 잔칫상에 단골이었던 홍어회 맛 등은 나의 여린 기억의 창고 속에 아직도 가득 찬 느낌으로 지난 시절을 회상한다.
간장과 된장 속을 왕복하며 동면을 마친 짠 무가 검붉은 색깔을 한 채 단맛과 짠맛을 알맞게 갖추어 밥상에 일약을 하고 모내기철이면 이글거리는 숯불에 구워내는 고등어 타는 냄새가 집안을 온통 뒤 흔들던 아름다운 시절들이 금싸라기처럼 회상으로 이어지는 추억의 시간들……
고향 어머님들의 보배롭고 따사로운 손맛이 세월의 흐름을 망각한 채 아직도 혀의 가장자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성춘향의 절개 같은 속성일는지……
지금은 옛날보다 좋은 세상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지만 그 때 그 시절에 흠뻑 젖었던 감칠맛 나는 음식 맛을 재현하고 재생시킬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때로는 부질없는 생각 속에 스쳐가는 고향의 추억으로 현실을 잠재우곤 한다.
여름밤이면 모닥불을 피워 놓고 평상에 마주 앉아 밤하늘에 수놓아진 별자리를 헤아려 가며 천진난만한 동심의 날개가 밤이슬에 흥건하게 적시던 나날들의 추억들이 삶의 풍요로움과 생의 희열을 북돋아 주는 느낌으로 저미어 온다. 사랑방에서 밤이 깊어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순도순 모여 앉아 재미나는 이야기에 열중했던 청순한 시절들을 함께한 인걸들은 다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현해탄 바다 건너와 그리움의 노예가 되고 외로움의 시녀가 된 삶의 실오라기가 창공을 나부낄 때마다 뼈저린 고독감이 나의 가슴을 엄습해 오고 보고픈 마음이 밀려올 땐 밤하늘을 향해 궐련연기 뿜어 가며 외로움을
달래보네. 갯내음이 물씬 풍기는 꼬막을 채취한 동네의 행사 때면 호롱불에 의지하며 밤늦게 귀가하는 식구들을 마중 나가던 주옥같은 과거들이 엊그제의 일처럼 기억 속에 아른거리고 매년 늦가을이 찾아오면 친구 집의 모서리에 자리 잡고 있던 유자나무에 송이송이 열린 노란색의 유자가 태양빛을 반사해 황금빛을 연출해 주던 아름다움이 모퉁이를 돌아서는 소년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밤이 되면 귀뚜라미의 울음소리와 함께 풍겨오는 유자의 향기가 어찌 그다지도 동심의 마음을 사로잡고 거세게 휘어 감았는지!
회상의 바구니가 가득 차 넘쳐흐르는 아기자기한 고향의 생각들로 밤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거리는 이 밤의 주인공이 되고 베개자락 자락마다 눈망울에 이슬이 초롱초롱 맺혀지는 것은 따사롭고 인자하신 어머님의 포근한 품처럼 고향의 불사조
같은 마력이 소생을 부둥켜안고 있는 까닭이리라. 인생의 보금자리이자 위대한 선물인 고향의 품은 떠나온 이들의 가슴속에 영원한 동반자이고 반려자이며 고향에 대한 상념의 빛이 퇴색하지 않을 때 삶의 가치가 고조되리라 믿는다.
차디찬 현실 속에는 네가 있고 나는 있지만 너와 나는 없는 서글픈 서곡이 지구촌을 엄습할 때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느낌은 단지 나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물질문명의 진화의 뒷골목에는 정신적인 폐허가 동반되고 그 나부끼는 틈바구니 속에서 인류의 정체성 결여의 항해가 계속되는 한 축복받지 못한 슬픔과 상처가 기다릴지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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