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문학도시》수필 등단. 부산문인협회, 부산수필문인협회 회원.BS금융문학상, 금샘문학상, 부산수필문협 올해의 작품상 수상.
2012년《문학도시》수필 등단. 부산문인협회, 부산수필문인협회 회원.BS금융문학상, 금샘문학상, 부산수필문협 올해의 작품상 수상.

 철제상자는 하찮다. 파란색이었나 의구심이 들 정도로 닳고 닳아 번들거린다. 여러 번의 충격에 찌그러진 모양새 또한 볼썽사납다. 세월에 묻어난 녹이 중간중간 머물고 아귀가 맞지 않아 사뭇 뻑뻑하다. 한껏 사투를 벌이다 아버지의 힘 있는 손길에 맥을 못 춘다.

해묵은 물건들이 상자 안에 오밀조밀 모여 있다. 보통은 엄마에게 요긴한 잡동사니로 그득하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각양각색의 단추들, 번번이 늘어난 허리춤에 고무줄을 끼워 넣는 도구로 사용하는 옷핀, 붙박이 용 진갈색의 자잘한 못, 뜯어진 이불이나 양말을 꿰매느라 상자 밖을 분주히 드나드는 서로 다른 크기의 바늘이 난잡하게 흩어져 있다.

그 사이에 아버지의 인감도장이 시선을 나눈다. 까만 도장은 당신의 흔들림 없는 모습처럼 견고하다. 가족들의 도장 없이 외따로 위풍당당 위엄을 앞세운다. 당신 도장은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아버지 그 자체다. 상자는 슬며시 안방 장롱 위 제한된 공간에서 가족들만의 영역을 확보한다.

키가 훤칠한 아버지는 별 무리 없이 상자를 꺼낸다. 다른 이들은 까치발을 들다 종종 상자를 쏟기 일쑤였다. 누가 볼세라 아버지는 매번 상자를 장롱 위 깊숙이 묻어두었다. 하필이면 그 케케묵은 상자에 담아 두려고 했을까. 더 이상의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 늘 그 자리가 익숙한 아버지의 아집이 확고하게 엿보인다.

ATM기기를 이용하기 난처한 어르신들에게 도장은 필수품이다. 아버지의 도장은 주로 은행에서 현금을 찾을 때 사용했다. 이따금 마을 이장 아저씨가 농촌 진흥청에서 필요한 동의서를 받기 위해 몇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아저씨의 간략한 설명은커녕 서류도 보는 둥 마는 둥 온전히 신뢰 하나로 아버지는 성큼 도장을 찍었다.

아버지는 도장을 찍을 때마다 항상 인주를 사용했다. 인주는 선홍빛 루주처럼 진하디진했다. 탁탁탁 손에 힘을 줘 인주를 묻힌 후 뜨거운 입김을 한껏 몰아넣는다. 왼손까지 얹어 도장을 꾹꾹 누른다. 지나치리만치 너무나 선명하다. 뜨뜻미지근한 것을 꺼리고 호불호가 분명했던 아버지의 완고한 성격이 여실히 드러난다.

난처하게도 자전거를 타고 가던 엄마에게 교통사고가 났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입원이 아버지를 한없이 허허롭게 했다. 혼기가 꽉 찬 무뚝뚝한 딸과의 대화는 별다른 의미도 진전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끼니때마다 밥상을 차려내는 것뿐, 엄마가 없는 빈자리를 대신하기에는 턱없이 서툴렀다.

이내 아버지는 동네 점방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다. 유독 음주를 즐겨하는 아버지의 걸음걸이가 방향을 잃고 비틀거렸다. 집에서 홀짝이는 술이 더더욱 씁쓸했는지 마실을 나간답시고 가게를 찾는 날들이 잦았다. 오래전 남편을 잃고 자식들마저 품을 떠나 홀로 고향을 지키는 아주머니가 가게 주인이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아버지의 넋두리에 대거리하며 막걸리 여러 병과 안주를 더해 팔았다. 덩달아 아주머니 또한 쓸쓸함을 한 꺼풀씩 덜어냈으리라. 의도치 않게 도시에 사는 이모들은 아버지가 아주머니와 정분이 났다며 의혹의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더군다나 엄마는 재수술로 인해 입원 기간이 부쩍 길어졌다. 엄마의 오랜 부재로 문갑 위에는 군데군데 색이 바랜 우편물이 수두룩하게 쌓였다. 그중 N 은행에서 날아온 꽤 낯선 아버지의 우편물이 보였다. 대수롭지 않게 북북 찢었다. 시선이 중간쯤 머문 찰나‘대출금 팔백만 원 농어가 목돈’이라는 내용에 멈칫했다. 팔십만 원도 아닌 팔백만 원은 시골 어르신들에게는 몇백만 배의 값어치가 있는 어마무시한 모갯돈이었다.

실로 의문스러웠다. 남의 돈을 빌릴 분이 아닌데 왜 이런 고지서가 날아왔을까, 누군가에게 된통 사기를 당했나 싶어 불안감이 뒤덮었다. 용지를 건네받은 아버지는 당신 얼굴 위로 파랑이 일렁이듯 당황한 기색이 얼비쳤다. 찬찬히 기억을 더듬더니 삐걱대는 자전거를 몰고 황급히 골목 어귀를 벗어났다.

행여 잃어버릴세라 꼭꼭 여며 챙기던 도장이었다. 한때 큰딸네는 점점 가세가 기울어 친정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적이 있었다. 당신 자식에게도 꿈쩍하지 않던 아버지의 마음은 처절한 외로움에서 흔들렸다. 자식들이 벌여 놓은 일에 다급해진 가게 아주머니는 바쁜소리를 해가며 눈물을 점점이 찍어 댔을까. 급기야 상자를 연 아버지의 도장이 사자어금니가 되었다. 혹여 술기운에 도장을 건네주었는지 창창한 기억력이 이번만큼은 온데간데없다.

모퉁이에 내몰린 도장은 지나치게 단단하고 차가웠다. 인주를 제대로 닦아내지 않으면 소위 도장밥이라는 두드러기가 생겨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아버지는 본래 사람 만나기를 즐겨하고 손님 맞기에 기꺼워하던 분이셨다. 그 일로 아버지는 위신이 서질 않았다. 언제부턴가 주위의 시선을 의식적으로 느낀 채 눈과 귀를 닫고 두문불출했다. 그해 늦은 봄, 간암 말기를 선고받은 아버지는 검버섯 가득한 얼굴에 동시다발적으로 쓰린 속이 더더욱 까맣게 타들어 갔다. 얼핏 입술 자국과 흡사한 도장부스럼처럼 아버지는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병원에서 죽음의 사투를 벌이다 임종을 맞이할 무렵. 심지가 곧은 엄마는 아무 걱정 말라고 아버지의 손을 연신 부여잡았다. 세상이 뿌옇게 바뀔 찰나, 두 눈 가득 괴로움과 허망함 뿐. 긴 호흡만 몰아쉬며 듬성듬성 빠진 치아 사이로 새어 나오는 묵음. 쏟아붓고 싶은 말 대신 야윈 팔만 휘젓는다. 잔정에 배려랄까, 연분의 호의랄까. 가슴 밭에 씻을 수 없는 낙인을 새긴 아버지는 가녀린 숨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 눈은 미망의 상태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일 층의 그늘진 베란다에 놓인 게발선인장 화분을 지그시 바라본다. 제 본분을 다하지 못한 자책감이 컸으리라. 어느 틈에 새빨간 꽃망울을 올망졸망 맺지 못한 채 무턱대고 이파리만 속절없이 자라는 도장(徒長)이다. 나는 가만가만히 잎을 닦아 슬몃슬몃 비쳐드는 햇살이 도망치지 않게 화분을 꼬옥 끌어안아 옮긴다.

점점이 수놓은 ‘참 잘했어요’ 유치원생 딸아이의 칭찬 도장이 이곳저곳에서 활짝 웃는다. 모처럼 허공에다 ‘하아’ 입김을 불어 넣는다. 도장은 또렷하게 선명했다. 거만하리만치 당당한 미소가 진하게 가득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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