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이나 기초 단체장들이 국가와 자신의 고장을 위해 큰 뜻을 펼치고자 나랏돈으로 떠나는 단체여행이 해외시찰이다.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그들은 번번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곤 한다. 올 여름 국고보조 없이 혼자서 북미 시찰을 떠났다. 목적지는 캐나다에 사는 딸네 집. 딸네 이사를 돕고 여름방학 동안 손녀딸과 함께 지내면서 손녀의 소원인 올랜도 디즈니월드 해리포터 마법의 성으로 휴가를 떠나는 것이었다. 또한 가는 길에 워싱턴에 사는 친구네 집도 들러보고, 보스톤에 사는 사촌동생도 만나보며 힐링 여행을 하고자 했다. 딸네 집에 다니러 간다고 했더니 친지와 친구들은 한결같이 좋은 구경 많이 하고 오라며 덕담을 건넸다. 그러나 정작 같이 가야할 남편은 손 사레를 치며 혼자 다녀오란다. 미국 딸네 집에 갔던 외삼촌이 “감옥이 따로 없다”며 3달 일정을 1달 간신히 채우고 돌아온 사례와 딸이 캐나다에 사는 친구도 역시나 3달 계획을 고작 2주일 채우고 돌아온 사례를 학습한 결과이다.

출국일이 다가오자 마음이 바빴다. 그동안 틈틈이 챙기던 가방을 싸고 풀기를 여러번 반복했다. 23Kg 짜리 가방 2개를 챙기는 일이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니었다. 김 다시마 말린 나물은 가벼운 대신 부피가 컸고, 고추장 된장 국간장 참기름 식혜가루 멸치 손녀딸의 한글 책은 부피보다 무게가 상당했다. 한국 식재료도 한국 수퍼에서 다 구입할 수 있다는 딸내미 말은 귓등으로 듣고,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가방은 정작 내 옷가지 넣을 공간이 부족해졌다. 마지막으로 출국일 새벽에 챙기려 냉장고에 고이 모셔둔 오이지와 찰옥수수는 깜박 잊고 비행기를 태우지 못했다.

출국 날짜가 정해지기 전부터 딸은 “엄마 틈틈이 영어 공부 해오셔요” 당부를 했다. 그래야 이웃 할머니들과 얘기할 수 있다고. 그래도 학교 다니며 10년 영어 공부를 했는데, 간단한 영어는 알아들을 수 있고 바디 랭귀지로 하면 되겠지. 정 못 알아들으면 스마트폰 번역기 도움을 받으면 된다고 했더니 딸의 대답. “여기는 인터넷이 잘 안 터진다고요!” 과연 집 밖에서 인터넷은 불통이었다. 지하철에서 인터넷은 커녕 전화통화도 연결이 안되는 캐나다였다. 뉴욕 토론토 지하철 승객들이 우아하게 신문과 책을 보며 이동하는데, 서울 지하철 승객들은 지하철에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다고 비난할 일이 아니었다. 스마트폰을 보고 싶어도 인터넷이 안되니 어쩔 수 없이 다들 책을 본다는 것이었다. 영어 발음은 생각과는 달리 너무 단순한 “플로어 텐”, 10층이라는 엘리베이터 안내방송의 발음도 들리지 않아 귀에 익숙해지는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가이드가 인솔하는 단체여행이 아니고 혼자서는 처음이라 입국심사가 걱정이었다. 요즘 입국심사는 입국신고서 작성을 하지 않고 설치된 컴퓨터에서 스스로 체크를 하는 시스템이다. 출력한 입국신고서를 여권과 함께 내밀며 입국심사대에 섰다. 나름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심사관이 뭐라고 묻는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인지 감도 오지 않아 “멍-” 하고 서 있는데 그냥 가란다. 그래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걱정하던 입국심사대를 통과할 수 있었다. 이렇게 쉬운 입국심사도 있나 했지만 그래도 무사통과해서 다행이었다. 요즈음은 여권에 입국 출국 스탬프를 안 찍는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12시간 전에 떠나온 인천 공항과 토론토 공항 풍경은 낮과 밤의 시차가 바뀐 것만큼 달랐다. 나름 캐나다 최대 공항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소박한 국제공항이었다. 콘도라 부르는 애들 집은 호텔처럼 잘 꾸며진 로비를 지나면 운동기구가 설치된 피트니스 시설과 실내 수영장까지 갖추어 화려해 보였다. 게스트룸에 바비큐시설도 있었는데 정작 개인 집은 소박했다. 현관에 초인종도 없었고, 한국에는 웬만한 집에 다 있는 인터폰도 없었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해 문을 제 때 열어주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문을 잠글 때에도 번호키가 아닌 열쇠를 사용하고 있었다. 딸아이는 열쇠 한 꾸러미를 늘 지니고 다녔다. 서울에서 아무 생각 없이 써오던 문명의 이기가 캐나다에는 없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안정감이 있어 보였고, 산도 없고 높은 빌딩도 없어서 그런지 도시는 커다란 단풍나무같은 여유가 느껴졌다.

어른들이 출근 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시작되었다. 신영복 교수님은 진짜 감옥에서 고생하셨지만, 나도 캐나다에서 주중에는 창살 없는 감옥살이를 했다. 손녀딸은 제 방에서, 나는 내 방에서 ‘방콕’ 했다. 5살 때 이곳에 와서 5년 넘게 캐나다에서 지내온 손녀딸은 모습은 한국 사람이지만, 머릿속과 생각은 10살 캐나디언 어린이였다. 태어나서부터 몇 년이나 길러준 할머니와의 추억은 간 데 없고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 집에서는 간단한 한국말을 쓰는데 할머니랑 대화 할 때는 모르는 단어를 제 엄마가 통역을 했다. 내가 쓰는 언어가 저절로 고급 한국어가 되었다. 영어 못하는 할머니와 한국말 못 알아듣는 캐나다 어린이의 불편한 동거였다. 바이올린 연습하고 노트북으로 공부하는 아이한테 내가 하는 말은 “점심 뭐 먹을래?” “과일 줄까?”가 전부다. 낮 시간 아이랑 손잡고 동네 도서관이나 공원에 가보려고 했었는데 서로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못하니 데면데면 했다. 덕분에 영어 못 알아듣는 아시안계 할머니는 그동안 못 보았던 한국 드라마를 ‘정주행’하고, 두껍고 재미난 책들을 실컷 읽는 호사를 누렸다.

20년 전 미국 서부에 여행을 다녀온 후 지도를 보니 내가 다녀 온 곳이 거대한 대륙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었음을 알았던 기억이 난다. 이번 여행지도 북미의 지극히 일부분이겠지만 나름 기대를 가져본다. 러시아에 이어 세계 2위로 넓은 면적을 가진 캐나다는 우리나라 땅의 거의 100배라고 하지만 인구는 채 4천만 명이 되지 않아 세계 각국에서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열린 나라다. 거리에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자유로운 몸매, 개성 있는 옷차림과 피부색을 다양하게 뽐내고 있었다. 한국에선 늘 아랫배가 신경 쓰였던 나는 이곳에선 ‘날씬이’가 되어 자신감을 회복하였다. 처음 만났을 때 “어디서 왔어요?” 묻는 것이 아니라 “무슨 언어를 쓰셔요?”라는 질문으로 서로의 배경을 묻는 것을 보니 이민자의 나라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나다의 독립기념일은 1867년 7월 1일으로 이제 막 150살이 넘은 젊은 나라다. 이때 우리나라는 고종 재위기로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강화도 덕진진에 결연한 쇄국의지를 표방한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 바다의 관문을 막고 지키고 있으니 다른 나라 선박은 함부로 통과 할 수 없다)를 새긴 비석을 세운 해이다. 한 쪽은 독립을 하면서 이민자를 대거 받아들이고, 한 쪽은 쇄국정책을 폈다. 각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고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고 하지만, 우리의 굴곡진 현대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캐나다는 한국전쟁 때 유엔군으로 약 2만 6천명이 참전을 하고, 5백 명이 목숨을 잃고 천여 명의 젊은이가 부상당한 우방국이기도 하다.

캐나다는 20만 명이상의 한국인 이민자들이 꿈과 희망을 갖고 사는 곳이고, 사랑하는 딸네 가족이 지내는 곳이다. 본인들이 선택한 이민자의 삶을 지지해 주고, 글로벌 지구촌 가족으로 성장하기를 바랄 뿐이다. 2019년 토론토에서는 1997년 미국에서 상상 못했던 삼성 휴대폰, 엘지 가전이 최고 대우를 받고, 거리에는 현대 기아 자동차가 수없이 달리고 있어 달라진 한국의 위상을 느낄 수 있었다. 식당과 도서관, 쇼핑몰에도 어김없이 다른 나라 인사말과 함께 적힌 “어서 오세요, 안녕 하세요” 라는 한글이 미소 짓게 한다.

한국에서 말과 글로 밥벌이하던 딸아이는 캐나다에서 네이티브 스피커에 비해 영어도 잘 못하는 동양인 이주노동자일 뿐이다. 주변에 열심히 영어공부하고 취직하여 성실하게 살아가는 한인들이 캐나다 사회에서 큰 차별받지 않고 인정을 받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딸과 손녀딸은 학교에서 영어 뿐 아니라 불어까지 배우며 수십 개 나라에서 온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고 일하고 있었다. 문득 한국사회도 이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이주노동자가 100만명이 넘는 시대를 맞이하였음을 깨달았다. 딸네 가족을 보니 한국사회에서 열심히 일하며 세금내고 살아가는 이주노동자들을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도 본국에서 걱정하고 있는 누군가의 가족일 터이니.

토끼풀이 마당 가득이고 수국 상사화 담쟁이도 보인다. 아름다운 저녁 노을을 뒤로 하고 비행기가 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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